경상북도 상주를 중심으로 한 퇴계 이황의 사상은 ‘퇴계학’이라는 단어를 만들 정도로 영향력을 끼쳤으며, 주요 중앙정치 세력을 형성한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후기 지배계급에까지 사상적 기반과 동기를 제공했다.
반면 오늘날 ‘실학’이라 일컬어지는 사상, 인물, 유물에 대한 연구와 지원은 매우 빈약하다 할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이 그동안 신봉해 온 성리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재야 지식인으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론에 몰입하는 성리학적 견해보다는 실질주의에 입각한 자연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한 여러 저술과 기기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 중기 거대한 양란을 거치며 정치, 경제, 사회, 역사적 해석에 상당한 변혁을 주장한 실학은 경기지역을 중심으로는 ‘기호실학’으로, 충청 이남에서는 ‘호남실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앙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던 기호실학은 정치사상개혁, 토지 및 세금 개혁, 병무 개혁 등에 중점을 두고 발전하게 된다.
반면, 호남실학은 지역적, 정치 권력적 특징으로 인해 백성의 삶에 무게가 실렸다. 수학, 천문학, 언어학, 지리학, 생물학, 수력학 등 오늘날 자연과학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룬 저서와 유물들이 호남실학에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발전은 소수의 실학자가 아닌 호남지역 전체에 걸쳐 일어났으며, 160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시대적 연속성 또한 이뤄져 왔다.
조선 중기 이후 화순적벽은 당대 문인과 지식인들은 반드시 찾아야할 명소였다. 때문에 당대에 내노라 하는 학자들은 모두 화순을 찾게 된다. 이로인해 화순적벽 옆 동네에 사는 석당 나경적은 담헌 홍대용에게 전수한 ‘혼천의’를 비롯해 자명종, 자전수차, 자전마 등 수학과 기계공학 및 역학을 이용한 기기들을 만들었으며 이후 규남 하백원은 조선과 세계를 아우르는 지도를 그렸고, 수력학과 기압을 이용하고 현대 피스톤운동을 구현할 자승차도해(양수기)를 서유구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화순실학의 학문적 전통과 같은 실학적 발전과 전수가 이루어졌던 사례를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았고, 그나마도 여전히 변형을 용납하지 않은 순수 유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실학의 학문적인 전통과 발전을 경시한 결과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물론 복합적인 다양한 원인이 있었겠지만 실학의 경시 태도도 일본에게 나라를 병탄 당하는 아픔을 겪게 했던 수많은 원인 중의 하나라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역시 다른지 않다.
4차산업혁명ㆍ인구소멸 시대를 맞이하여 화순은 AI와 메타버스, 그리고 미래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지역생존전략 역시 ‘실사구시’나 ‘실용주의’를 표방했던 화순실학의 학문적 전통에서 해법을 찾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일 것이다.
호남실학의 중심이었던 화순실학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아 앞으로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어쩌면 역사적으로 당연한 귀결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저작권자 ⓒ 화순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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